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 14세 요한 (문단 편집) === 1810, 스웨덴의 후계자로 지명됨 === [[1810년]], 칼 아우구스트 왕태자가 사망하여 후사가 없었던 '''[[스웨덴 국왕]] [[칼 13세]]가 그를 양자로 들이고 후계자로 지명해버렸다!''' 물론 왕이 뜬금없이 엉뚱한 사람을 지명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스웨덴은 정치적 불안정과 [[핀란드]]를 둘러싼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하여 1809년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폐위당하고 그의 삼촌이던 초로의 칼 13세가 즉위했다. 그는 친자가 없었기에[* 사생아는 존재했다] 덴마크 왕자였던 칼 아우구스트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이 양자가 그만 1810년 급사하고 만 것.[*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이때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 암살 의혹을 뒤집어쓰고 시민들에게 린치당해 사망했다.] 왕실 계보가 끊어질 위기에서 다른 양자를 들이려던 칼 13세와 신하들은 프랑스로 눈을 돌렸는데, 이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군대는 바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었으므로 나폴레옹의 가족이나 친척 또는 원수 중에 한명을 칼 13세의 양자로 삼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힘을 빌려보자 한 것이었다. 베르나도트는 정치적 식견도 상당했고 보나파르트 왕조와 인척[* 그의 아내 데지레의 언니가 나폴레옹의 형 [[호세 1세|조제프]]의 아내였다.]이었으며 때마침 스웨덴인들의 호감까지 사고 있었기 때문에 최적의 후보로 꼽히게 되었다. 사실 스웨덴에서는 처음에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이자 나폴레옹의 양자인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왕위 계승을 요청했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외젠이 개신교 개종을 거부하자 베르나도트에게 왕좌가 넘어간 것. 외젠이 계승을 수락했다면 역사가 크게 변했을지도? 스웨덴 의회는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의 [[국교]]인 [[루터교회|루터파]] [[개신교]]로 개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가 후계자가 되는 것에 동의하였고, 베르나도트는 평소 개신교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베르나도트는 열렬한 종교주의자도 아니었으니 개종은 어렵지 않았다. 하기사 '''종교만 바꾸면, 그것도 이슬람이나 불교처럼 아예 다른 종교가 아니라 기존에 믿고 있던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온 지 300년도 안된 개신교를 믿으면 왕을 시켜준다'''는데 독실한 신도가 아니고서야 누가 안하겠냐만은.] 나폴레옹은 방금 전까지 적국의 요청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고 별로 미덥지 않았지만 거듭된 요청에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베르나도트에게 제안을 전달한다. 베르나도트가 제안을 승낙하자 나폴레옹은 처음에 그에게 스웨덴을 통치하게 되면 프랑스에 절대 대항하지 않을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요구를 스웨덴 통치자로서의 의무와 상충되는 행위라고 하며 거부했고, 결국 나폴레옹은 그를 프랑스에 대한 모든 의무에서 해방시킨다는 조건에 동의하고 [[스톡홀름]]으로 보냈다. ~~몰락의 전조~~ 또 나폴레옹은 자신이 버린 약혼녀 데지레에 대한 속죄의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데지레가 원래의 약혼자는 프랑스 황제, 친언니 마리는 나폴리 왕비를 거쳐 스페인 왕비가 되었는데 본인은 고작 퐁트 코르보 공비에 지나지 않았으니 상당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정치나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 데다가, 스웨덴에서의 삶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추워서.] 그런 의미에서 옛 애인에게 스웨덴 왕비 자리 하나 주려는 뜻이었을지도 모를 일. 처음에 칼 13세는 베르나도트를 탐탁찮게 여겼으나, 1810년 11월 스톡홀름에 도착한 베르나도트를 직접 만나보자 왕비와 함께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브라헤 가문[* 무려 [[구스타브 1세 바사]] 시절부터 내려오는 명문 귀족이었다.]을 비롯한 귀족들도 베르나도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스웨덴 국민들도 베르나도트가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되찾아줄 것이라는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따라서 스톡홀름에 도착하자마자 베르나도트는 늙은 왕 대신 명실상부한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의 열망과는 달리 베르나도트는 핀란드를 되찾는 것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우선 스웨덴과 러시아의 국력 차이는 현저했으며 [[대북방전쟁]]부터 시작된 기나긴 러시아와의 항쟁(특히 1809년의 핀란드 전쟁)으로 국고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또한 베르나도트는 핀란드를 되찾는다 해도 그로 인해 촉발될 러시아와의 적대관계와 전쟁에 대해 우려하였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스웨덴 국민의 지지가 영토 확장에 기반하고 있음을 잘 알았기에, 베르나도트는 핀란드 대신 새로운 목표인 [[노르웨이]]에 눈을 돌렸다. 노르웨이는 [[올루프 2세]][* 덴마크 공주(나중에 여왕) [[마르그레테 1세|마르그레테]]와 노르웨이 왕 호콘 6세의 아들로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외손자이자 스웨덴 왕 [[망누스 4세]]의 손자였다.] 이래로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는데, 베르나도트가 보기에는 지키기도 힘들고 러시아가 항시 노리는 핀란드보다 만만한 덴마크가 다스리고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확고하게 통일할 수 있는 노르웨이가 더 매력적인 목표였다. 한편 1810년 그가 스웨덴에 도착하자마자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덴마크를 움직여 스웨덴이 대륙 봉쇄령에 참가할 것과 영국에게 선전포고할 것을 요구했고, 베르나도트는 내키지 않았지만 이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영국과 스웨덴은 이후 1812년까지 명목상으로 전쟁 상태였으나 실질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륙 봉쇄령은 완전히는 아니어도 지켜졌고,[* 완전히 영국과의 무역을 단절한다면 스웨덴의 경제가 작살날 판이었다. 안 그래도 스웨덴은 1809년까지의 전쟁으로 재정도 경제도 말이 아니었다.] 스웨덴에서 영국 상품 수입 총액은 1810년 48억 파운드에서 1811년 5억 파운드로 줄어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